현월 1-2

냉랭하게 빛나는 달이 어둠에 가리어졌다. 달빛이 얼룩진 대지의 그림자가 질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희미한 빛들이 꼬리를 퍼덕이다 이내 삭아들었다. 푸른빛이 날을 세우고 한줄기 획으로 인형의 형체가 스쳐갔다. 냉기에 가라앉은 대기는 고요했고, 뭔지 모를 인광(燐光)의 망령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 이 녀석, 도대체 뭐하는 물건이지?!

시간의 흐름과 겹쳐 더디어진 인형의 형체는 엷어진 잔광을 경계로 그림자를 완연한 입체로 드러냈다. 짙은 얼룩무늬의 피부 위로 넘치는 금속의 냉기가 감돌았다.

질량에 뭉개진 지형을 이족으로 주파하는 기동성은 무한궤도의 차량과 벽을 두었다. 몸이 그대로 따라붙은 듯한 반응성이었다. 골격과 기갑돌격병의 차이는 없었다.

- 최 오장(伍長), 너무 출력을 높이지 마! 몇 차례 한계실험을 거친 고물이라서 불안하단 말이다. 영자증기의 압력과 전기계통의 신호는 체크하고 있나?

- 옛! 아직까지는 이상 없습니다. 좀 더 이 상태로 굴려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현 일본육군의 주력전차인 97식 경(輕)전차 하호(ハ号)와 97식 중(中)전차 치하(チハ)를 비교대상으로 삼은 토치의 야간전투 환경적응 테스트. 여기서 인간형의 토치는 완전히 조명을 차폐한 환경에서도 신속한 반응을 보였고 다양한 야지의 등판성능에서도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줬다.

- (여기서 잘 한다면, 어머니를 고생시키지 않고 동생들도 학교에 보낼 수 있어. 나도 공부할 수 있고.)

만주의 냉기에 영자증기의 가열된 열기가 기갑돌격병의 배출구로 토해졌다. 기계는 구름을 타고 띠를 둘러 북을 치는 귀신의 형상으로 달렸다. 육안으로 보이는 관측창에 야간전투용 적외선 투사기의 빛이 단안(單眼)으로 엷게 흘렀다. 언덕에 노획한 M3 경전차가 보였다. 무선으로 움직이는 전차의 기동을 간단한 보행전환으로 돌아 후면으로 37mm 포의 사선이 전차와 이어져 소염기에 불꽃이 일었다. 전차는 허물을 벗는 벌레처럼 장갑을 벗어 화염을 뿜었다. 소년은 그 소멸의 에너지에 숨이 가빠졌다.

- 이걸로 좋은 건가.

- 물론입니다. 단기간의 교육을 마친 녀석들로도 이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니까요.

- 난 그런 걸 말한 게 아니다.

목소리가 단조했다. 기술 담당자는 2m가 넘는 거한의 압력에 눌렸다. 대위는 편제에 오른 병력의 신상명세를 넘기며 신음했다.

- 저 기갑돌격병을 조종하는 놈이 겨우 17살이라고. 아버님과 형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한다고 보나.

- 제국육군의 명예입니다. 최현은 기갑돌격병 탑승원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은 것으로 발탁된 것이지 다른 것은.....

그는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턱이 가르치는 곳에 종종걸음으로 빠졌다. 정도준(鄭道俊)은 이것이 과연 전쟁이 맞는가를 의심했다. 남경의 밤하늘에 밝힌 불로 흐르는 포탄의 강이 얼굴도 모르는 어린 하사관의 모습과 겹쳐졌다. 남작의 작위로 조선반도의 방구들 위에 누워 헛기침을 뱉는 아버지와 그저 엘리트 코스의 참모로서 숫자놀음의 전쟁을 치러온 형이 과연 전쟁을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전쟁에서 죽음은 기러기 깃털처럼 가벼웠다. 총탄이 빗발치는 거리에 홀로 남겨진 거리의 소녀가 죽어 가는 순간의 고통과 지평선을 불사른 전투기들의 비행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아이들의 호기심이 떠올랐다.

피는 몸속으로 흘러 쇠를 가두고 몸 바깥으로 뿜어져 전쟁을 완료했다. 제국의 창검과 화포는 강대했기에 그 피는 고결할 수 있었다. 전쟁과 피는 서로의 작동을 원하고 있었다. 남경의 거리에 널린 사람들의 모가지에 떨어진 핏방울이 떠올랐다.

그때 대위는 젊은 소위후보생이었다. 그때도 여전히 살아있던 자신의 피는 죽어가는 피들 앞에서 절망했다. 내장 바닥에서 구역질이 올라와 온 몸을 비벼댔다.

제국연호 쇼와(昭和) 11년, 서력 1937년 - 육군급진파의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을 뿌리로 중일전쟁의 전란이 자라났다. 삶은 흙으로 썩고 죽음이 송장 위에 열매 맺었다.

중국의 강력한 저항을 더욱 잔혹한 희생을 팔아 돌파한 제국군은 죽음을 넘어서 인간을 버렸다. 그해 12월, 천황의 제도(帝都)와 조선의 한성은 남경에서 멀었고 인적의 자취가 엷었다. 그때 도준은 중국에서 싸웠다. 전선은 격했고 죽어 껄떡이는 생명들이 천지에 퍼덕거렸다. 삶이 장작과 가는 실처럼 타들어가고 끊어졌다. 그때 귀밑머리가 검은 어린 중국병사의 목을 총검으로 꿰뚫으면서 자신의 그 소년이 자신의 다리에 찌른 허벅지에 스며든 피가 같은 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같은 피의 색이 무서워 목의 살점이 튀어나갈 때까지 살점을 후비고 팠다. 정신을 차린 것은 어디에도 인간의 형상이 남아있지 않은 후였다. 다시 포탄을 따라가 많은 사람을 죽였다. 총검의 날은 피에 무뎌지고 사방에 인간이었던 고기의 덩이리가 묻었다.

붉은 피가 나오지 않는 사람을 찾으려 했으나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을 때 그는 전쟁과 타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경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고 숫자를 셀 수 없었기에 그저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만 말했다.

제국육군의 주력은 1월까지 남경에 머물렀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었다. 글은 개개인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았고 그 각자의 삶과 죽음이 숫자의 역사가 되어 종이 위에 뒤틀리고 문드러져 모두가 기억하되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뜻 없는 세상이 바로 전쟁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오랜 기억처럼 마음 깊은 곳에 너무나 생생히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언어와 숫자와 기호로 나타낼 수 없는 울컥거림이 구역질의 비늘로 돋아났다.

도준은 그때 어머니가 남긴 묵주라는 물건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기도를 본적도 없는, 어느 중동 사막에서 천년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유대인의 왕에게 바쳤다. 그 왕이 다시 오는 날 이 세상은 새로운 개벽이 열리는데 그것은 임금과 상하빈천의 분별이 없이 모두가 가지런하게 사는 세상이 온다고 했다. 자신은 나라가 없었기에 임금과 양반이 없는 세상에 살았지만 그런 나라는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그런 나라를 보고 싶어 기도를 했다.

 

by 티안무 | 2008/07/24 00:16 | 현월(弦月, Crescent)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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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7/24 15: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티안무 at 2008/07/24 16:33
옙, 그걸 노렸으니까요.
Commented by 검투사 at 2008/07/25 12:37
우째... 뜬금없이 "기신병단"이 생각나네요... -ㅅ-;
혹시 나중에 가면 "독일제 원조 로봇"과도 싸우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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